부천에서 구석기시대나 신석기시대 유적이 아직 까지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월동유적과 범박동 유적에서 구석기문화층인 고토양층이 확인된 바 있고, 고강동 선사유적의 7차 발굴조사에서 다각면원구 등의 구석기가 수습된 것으로 보아 구석기시대에 사람이 살 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한 범박동 유적 발굴조사 당시 빗살무늬토기편이 수습된 바 있어 그곳에 신석기 시대 취락 또는 주거지 등의 생활유적이 있었음을 유추 해 볼 수 있다.
삼한시대 부천 지역은 마한 54국 중 하나에 속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백제가 마한의 소국을 통합하면서 백제의 영역이 되었다. 5세기 장수왕의 남하 정책으로 부천은 주부토군(主夫吐郡) 내 영역으로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
511년 잠시 백제의 영토가 되었다가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신라가 설치한 신주(新州)에 귀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대(759) 한주(漢州) 장제군(長堤郡)으로 지명을 개칭하였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 후, 940년(고려 태조 23) 장제군은 수주(樹州)로 개칭되었고, 995년(고려 성종 14) 관내도(關內道)에 속하게 되어 단련사(團練使)라는 지방관을 두게 되었다.
1005년(고려 목종 8) 단련사가 폐지되자, 1018년(고려 현종 9) 양광도(楊廣道)에 속하여 지주사(知州事)라는 지방관을 두었다. 1150년(고려 의종 4)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에 속하였다가, 1215년(고려 고종 2)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1308년(고려 충렬왕 34) 도호부에서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되었고 1810년(고려 충선왕 2) 전국의 목(牧)이 폐지되자 부평부(富平府)가 되었다. 1390년(고려 공양왕 2) 양광도(楊廣道)의 경기우도(京畿右道)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 건국 초 부천지역은 ‘부평부(富平府)’로 존재했다. 이는 고려 충선왕 대인 충선왕 2년(1310)에 정비된 체제를 그대로 유지한 것이었다.
태조 2년(1393) 11월 부평은 연안(延安) 지역과 함께 경기우도(京畿右道)에 소속되 었으며, 계수관(界首官)이 파견되었다.
이듬해 도읍을 개성(開城)에서 한양(漢陽)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도(道)의 경계 개편이 이루어지자, 부평은 경기우도에 속하게 되었다.
태종대 8도 체제의 확립으로 부평은 1413년(태종 13)에 ‘부평도호부’ 로 편성되었다.이로써 부천 지역은 종3품인 부평도 호부사(富平都護府使)에 의해 다스려지게 되었다. 이어서 태종이 경기의 좌도와 우도를 통합하여 ‘경기(京畿)’라고 만 칭함에 따라 부천 지역은 경기에 편입되었다.
그 이후 죄인의 거처라는 이유로 두 번의 읍호승강을 겪었고, 1707년(숙종 33) 부평도호부로 복귀되어 1895년까지 도호부의 위치를 유지하였다.
최종수정일 : 2024-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