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변씨 집안의 선산인 청룡산에 자리한 공장공 변종인(1443~1500)의 신도비로, 1996년 2월에 비각을 세워 비문의 훼손을 방지하고 있다. 조선시대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벼슬을 가진 사람만이 세울 수 있었는데, 이를 통해 조선시대 무인으로 한 시대를 호령하던 변종인의 내력을 읽을 수 있다. 신도비문에는 일이 있을 때마다 힘을 다하였으며, 평생 바른 말을 하고 행함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사람을 대할 때에 항상 화기를 띠고 집에 있을 때에 자신에 엄격하고 청탁을 행하지 않고 담백하였다고 전한다.
신도비의 머릿부분인 옥개석은 팔작지붕을 대신하여 연꽃을 형상화하고 음각을 한 화관석으로 장식하였다. 신도비 아랫부분인 비좌는 방부(方趺)이며 문갑무늬와 안상(眼象)이 새겨져 장식함으로써 신도비에 예술성을 돋보이게 하였다. 안타깝게도 마모가 심하여 비문의 판독은 어려운 실정이다. 신도비 위로는 변종인의묘가 자리하며 장명등, 망주석, 문인석 등은 근래에 세웠다.
한언(韓堰, 1448~1492)은 본관은 청주, 자는 옥경(沃卿)이다. 한명진(韓明溍)의 아들이며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조카이다. 한언의 묘지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그 앞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장명등(長明燈)이 세워져 있다. 묘지 양쪽으로 망주석이, 그 옆에 문인석이 양손을 앞쪽으로 끼고 있는데, 석물의 크기나 형태로 봐서 중국풍 양식을 받아들여 만들어진 것이 특이하다. 이것은 한언이 중국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객사하였기에 그 곳에서 한언의 유해와 함께 석물들을 실어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언의 묘소는 한씨 문중의 종중산으로 밝다는 의미의 함박산이라고 불린다. 한씨 가문에서는 한씨들의 터가자리를 잡고 있는 산이라 하여 한기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언의 묘표는 일반적인 신도비의 전액 부분과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신도비라 불리던 것을 2013년 5월 13일에 ‘한언 묘와 묘표’로 명칭 변경 지정하였다.
한언(韓準)의 묘표가 있는 건너 작은 산에 한준(韓準, 1542~1601) 묘와 신도비가 자리한다. 청천군 한준의 묘역은 부인과 함께묻힌 쌍분이다. 묘지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이 세워져 있다. 청천군 한준의 신도비는 팔작지붕 옥개석과 검은돌인 오석제의 비신, 문양 없이 네모지고각이 진 방부형 비좌로 이루어져 있다.
한준은 한수경의 아들로 1566년 문과에 급제해 예조좌랑, 장령, 좌승지, 전라도 관찰사,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후에는 영의정 청천부원군에 추증되었다. 한준 묘지 바로 위쪽으로는 부친 한수경의 묘역이 자리한다. 한준 신도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이 글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미수기언』 별집 제16권에 한준의 신도비명이 게재되어 있다. 비문상단에 ‘신도비명’ 이라 음각되어 있어 신도비임을 알수 있다. 신도비 자체는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이한규(1662~1729년)는 조선 중기 무인으로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평안북도 창성(昌盛)을 방어하는 창성방어사, 충청지역에 군함을 띄우는 것을 통제하는 충청수군절도사, 경상우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묘는 1729년(영조5년) 양주에 장사 지냈다가, 14년이 지난 1743년(영조19년) 현재의 여월동에 이장했다. 이한규의 묘 앞에 묘비, 상석, 혼유석, 장명등, 망주석 등의 석물들이 갖추어져 있다. 호석(護石)에는 12간지가 음각되어 있다. 비문은 1780년(정조 4)에 증손인 절충장군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이문덕이 지었다.
부천농기고두마리보존회에서 전승하고 있는 민속의례로 매년 8월 15일에 중동과 상동 일대에서 개최된다. 이 농기고두마리는 6월 김매기를 마무리하면서부터 시작했는데, 애벌매기와 두벌매기 때에는 농기를 논두렁에다 꽂고 농악대는 신나게 악기를 치며 흥을 돋우고 일꾼은 논매기에 흥겨워 일을 잘하게 됐다고 한다.
놀이 구성은 놀이마당 들어가기-논매기 준비를 위한 한마당 놀이-논매는 소리-논을 맨 후 마을잔치-풍년제 지내기-농기(農旗)다툼(상좌다툼)-농기다툼 후 격식 ①농기다툼 후 격식 ②뒷풀이 등 아홉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명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나 3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7년 경기도민속예술축제에서 종합우수상(2위)을 차지해 경기도 대표로 출연한 제40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우수상(문화관광부장관상)을 받아 부천의 민속전통을 전국에 알렸다.
귀인 조씨(1707~1780년)는 조선시대 영조의 후궁으로 본관은 풍양이며, 1707년(숙종 33) 아버지 조태징과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귀인 조씨는 1716년(숙종 42) 입궁하였고, 1735년(영조 11) 9월 9일 영조의 여덟째 딸인 옹주를 낳아, 한 달 후인 10월 16일 내명부 종4품 숙원에 봉작되었다. 이때 낳은 옹주는 다음해에 사망하였으나, 1740년(영조 16) 영조의 열째 딸인 화유옹주를 출산한 이후 종2품 숙의로 진봉되었고 1780년(정조 4) 10월 5일,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분묘는 원래 부천시 작동 산112-19번지 위치하였으나, 2005년 4월 부천시 여월동 산32번지로 이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묘 앞에는 혼유석 1기, 비석 1기, 향로석 1기, 망주석 2기 등의 석물들을 갖추었다. 옥개형 묘비의 높이는 149m이며 상석은 가로 131㎝, 세로 88㎝, 두께 42㎝이다. 두 번째 석축의 경우, 장방형의 화강암 판석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화유옹주(1740~1777년)는 조선의 왕족으로, 영조의 10녀이며 어머니는 귀인조씨이다. 1740년(영조 16) 9월 29일, 영조와 숙원조씨(귀인조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1753년(영조 29) 2월 27일 14살이 된 화유옹주는 황인점과 혼인하였고, 2년 후 출궁하였다. 이후에도 영조는 여러 차례 화유옹주의 저택에 친림하였고, 1777년(정조 1) 5월 21일 38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묘역은 본래 부천시 작동 산126번지에 곡장을 두르고 옥개형 묘비와 혼유석, 상석, 향로석 등을 갖추고 있었으나, 1991년 6월 부천시 작동 산28-6번지로 이장하였고, 다시 2005년 6월 부천시 여월동 산32번지로 이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91년 9월 부천시 중구 일대 도로확장공사로 오정구 작동 126번지에 있던 화유옹주와 황인점의 합장묘를 이장하던 중 여러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때 생전에 사용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생활용구 위주로 화유옹주묘에서 옥제석류잠(玉製石榴簪), 금은제석류잠(金銀製石榴簪), 청와백자연판문소완(靑畵白磁蓮瓣文小碗), 유제(鍮製)등잔대, 은제과형(銀製瓜形)주전자, 옥제이배(玉製耳杯), 은제담배함 등 31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8대 종손(황선욱)이 문화재청 덕수궁궁중유물전시관(현 국립고궁박물관)에 모두 기증하였다.
최종수정일 : 2024-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