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내용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뉴스

  • 스크랩
  • 전자점자 뷰어보기
  • 전자점자 다운로드
뉴스상세조회 테이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서오릉을 소개합니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7-07
‘서쪽에 있는 다섯 개의 능’이라는 뜻의 서오릉은 서울 서쪽과 경계를 이루는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있다. 사극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 인수대비, 숙종, 인현왕후, 장희빈 등이 잠들어 있는 곳이 바로 서오릉이다. 서오릉은 사적 제198호로 등록되어 있으며, 2009년 6월 30일에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음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서오릉 안에는 왕릉 5기 외에 2기의 원과 1기의 묘가 있다. ​
서오릉 종합 안내도(왼쪽)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서오릉(오른쪽)  ⓒ 이서연 기자


명릉은 19대 숙종과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 민씨,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 김씨의 동원이강릉이다. 동원이강릉이란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각각 능을 조성한 형태이다. 정자각 쪽에서 능을 바라봤을 때, 오른쪽 쌍릉(한 언덕에 왕과 왕후의 능을 나란히 조성한 형태)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 왼쪽 단릉이 인원왕후의 능이다. 숙종은 1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대동법의 전국 실시, 화폐 유통, 백두산정계비 설치, 왕실 규율 확립 등 업적을 남겼다. 인현왕후는 1681년에 왕비가 되었으며, 원자 책봉 문제로 폐위되었다가 1694년 복위되었다. 1701년에 세상을 떠나 명릉에 처음 모셔졌다. 인원왕후는 1702년에 왕비가 되었으며, 붕당정치 속에서도 영조를 끝까지 보호하여 왕위에 올렸다. 명릉의 석물은 숙종의 명에 따라 크기를 줄이고 간소하게 만들어졌다. 익릉은 19대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 김씨의 능이다. 인경왕후는 11세에 왕세자빈이 되었다가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천연두에 걸려 20세에 세상을 떠났다. ​

익릉  ⓒ 이서연 기자


익릉은 숭릉의 양식에 따라 능에는 난간석만 둘렀다. 정자각은 맞배지붕의 건물이며, 익랑(문의 오른쪽과 왼쪽에 잇대서 지은 행랑)이 있다. 홍살문부터 정자각까지 경사진 땅에 박석을 깔고 지형에 맞춰 향로와 어로가 조성된 점이 독특하다. 향로와 어로란,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길로 박석을 깔아 놓았으며,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제향시 향을 들고 가는 길이라 하여 향로, 오른쪽의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어로라고 한다. 경릉은 추존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의 동원이강릉이다. 덕종은 세조의 맏아들로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20세에 세상을 떠나 시호를 의경세자라 하였다. 이후 둘째 아들 자을 산군이 왕이 된 후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는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남편 덕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수빈이 되었고, 성종이 왕위에 오른 후 인수대비로 책봉되었다. ​

경릉  ⓒ 이서연 기자


일반적으로 왕릉은 정자각 쪽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왕의 능, 오른쪽에 왕후의 능을 조성한다. 이와 달리 경릉은 반대로 오른쪽에 왕을 모셨는데, 이는 세상을 떠났을 때 신분의 차이 때문으로 보인다. 신분의 차이로 인해 덕종의 능은 묘의 형태로 조성되었으나, 소혜왕후의 능은 왕릉의 형태로 조성된 사실도 흥미롭다. 홍릉은 조선 21대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이다. 정성왕후는 연잉군의 부인이 되었다가 1721년 왕세자빈이 되었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조선 역대 왕비 중 중전 재임 기간이 약 33년으로 가장 길었으나, 영조 사이의 자식이 없었다. 1757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홍릉  ⓒ 이서연 기자


홍릉의 전체적인 배치는 쌍릉 형식이나, 정자각 쪽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능의 왼쪽이 비어 있다. 이는 영조가 생전에 정성왕후와 함께 묻히려고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어 비워 두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조의 능이 구리 동구릉의 원릉에 조성되면서, 현재에도 그 자리는 비어 있다. ​

창릉  ⓒ 이서연 기자


창릉은 조선 8대 예종과 두 번째 왕비 안순왕후 한씨의 능으로, 서오릉의 영역 안에 왕릉의 형식으로는 처음 조성된 능이다. 정자각 쪽에서 능을 바라봤을 때, 왼쪽 언덕에 예종의 능, 오른쪽 언덕에 안순왕후의 능이 있다. 예종은 세조의 둘째 아들로 형 의경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8세에 세자로 책봉되어 19세에 세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남이의 옥사를 수습하였고, ‘경국대전’을 완성하였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안순왕후는 세자 후궁이었다가,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연산군 때 세상을 떠난 후 창릉에 모셔졌다. 두 능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예종 능에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에 고리 모양의 무늬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수경원은 조선 21대 영조의 후궁이자 추존 장조의 황제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원이다. 영빈은 1701년 궁녀로 입궁한 후 1726년 영조의 후궁이 되었다. 이 후 1730년 영빈으로 책봉되었으며, 1764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1899년 아들 사도세자가 장조의 황제로 추존되자 황제의 사친 지위에 맞게 수경원으로 격상되었다. 수경원은 원래 서울 연세대학교 안에 있었으나 1970년 9월 8일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

순창원  ⓒ 이서연 기자


순창원은 조선 13대 명종의 맏아들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원이다. 순회세자는 7세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13세에 세상을 떠났다. 공회빈은 1561년 왕세자빈이 되었으나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 왕비가 되지 못하였다. 1592년 세상을 떠났는데, 임진왜란의 혼란 속에서 시신이 수습되지 못했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신주를 만들어 순회세자와 합장하였다. ​

대빈묘  ⓒ 이서연 기자


대빈묘는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의 후궁을 거쳐 왕비가 되었다가 폐위된 희빈 장씨의 묘이다. 처음 궁녀로 입궁하였다가 숙종 12년에 숙종의 후궁이 되었고, 숙종 14년에 소의의 품계에서 숙종의 첫 왕자 윤을 낳았다. 숙종은 장씨를 희빈으로 올리고 인현왕후를 폐위한 다음 왕비로 책봉했다. 희빈 장씨는 숙종 27년에 인현왕후를 무고한 죄로 사약을 받아 43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경종이 임금이 되면서 옥산부대빈으로 추존되고, 묘의 이름을 대빈묘로 하였다. 대빈묘는 원래 경기도 광주에 있었으나 1969년 6월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

재실  ⓒ 이서연 기자


재실은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위하여 능참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례시에는 제관들이 머무르면서 제사에 관련된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공간이다. 재실은 기본적으로 능 하나에 재실이 하나씩 별도로 지어졌으나 현재 서오릉에는 명릉 재실의 일부분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

  ⓒ 이서연 기자


서오릉에서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었고,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산책을 할 수도 있었다. 지친 일상 속에 배움도 얻고 위로도 받을 수 있는 경기도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서오릉을 지금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바란다.
본문 바로가기
뉴스이전글다음글
다음글 경기도, 8월까지 도내 49개 물놀이형 수경시설 일제 점검
이전글 어린이가 직접 ‘아동권리’에 목소리를 내다
  • 정보제공부서 : 부천시 콜센터
  • 전화번호 : 032-320-3000

홈페이지의 서비스 품질 향상을 위해 만족도 조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얼마나 만족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