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내용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지난호보기

  • 스크랩
  • 전자점자 뷰어보기
  • 전자점자 다운로드
지난호보기상세조회테이블
최초의 부천군청 설치와 역사(1914년 ~ 1921년)

최초의 부천군청 설치와 역사(1914년 ~ 1921년)
 

<복사골부천> 5월호에 서술했듯이 1914년 일제는 식민 통치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행정구역 개편인 부군폐합(府郡廢合)을 실시하고, 조선총독 부령 111호 ➋ 에 따라 인천부(개항장 제외)와 부평 군, 남양군 2개 면, 강화군 4개 도서를 부속(付屬) 하는 부천군(富川郡)이 처음 탄생했다. 부천군청도 인천부 구읍면 관교리(부천군 문학면 관교리) 의 옛 인천도호부 관아로 옮겨가게 되었다.
 


▲ 국립중앙도서관 화도진도(花島津圖) ➊ 에서 보이는 인천도호부 관아


당시의 문학면 관교리는 인천도호부 관아와 향교가 있던 인천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개항 이후 1883년 감리서(監理署)가 제물포에 설치되면서 중심지가 대거 제물포로 옮겨가게 되었다. 인천 읍치(邑治)의 서북쪽 15리에 있던 제물포는 군사적 역할을 했을 뿐 개항 전까지 작은 어촌 포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개항 후 개항장이 설치되면서 큰변화를 맞이하였다. 제물포에 설치된 대외무역과 조계(租界) 관련 사무를 담당하던 감리서가 인천 부의 행정업무까지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문학면 관교리는 인천부 읍치의 지위를 상실했고, 1914년 부천군이 신설되고 초대 군청이 관교리의 인천도호부 관아 건물로 들어오면서 다시 한번 광역 부천군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되었다.


▲ 옛 인천도호부 관아 사진


초대 부천군청의 건물로 사용된 옛 인천도호부 관아는 현재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객사(客舍)와 동헌(東軒) 일부가 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국립 중앙도서관 소장 중인 화도진도에는 동헌, 문묘 (文廟), 객사 등 인천도호부 관아 건물들이 자세 하게 그려져 있다. 현재 인천향교 옆에 세워진 인천도호부 관아는 이 화도진도를 근거로 2001년에 복원한 것이다. 1864년 간행된 인천부읍지(仁 川府邑誌) ➌ 에 따르면 관아 건물은 외삼문(外三 問) 3칸, 객사 20칸, 동헌 10칸을 비롯하여 각종 창고와 사무공간, 군사시설과 재판시설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 문학초등학교에 보존된 관아건물


한편 1900년대 초 옛 인천도호부 관아를 찍은 사진이 우편엽서 형태로 남아 있어 관아의 상세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의 아래에는 조선 인천부(인천항과 약 2리 거리)[朝鮮 仁川府(仁川 港 去 約 二里]라고 쓰여 있다. 문학초등학교는 1918년 부천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여 부천이라는 명칭이 들어간 최초의 학교였다. 그러나 관교리가 인천부로 편입되면서 1939년 인천문학공립 소학교로 명칭이 변경됐다.

장정규 (부천문화원 연구위원/학예연구사)

※ 이곳에 실린 필자의 의견은 부천시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➊ 1879년에 간행된 화도진도의 2장의 지도 중 인천부 전체를 그린 첫째 장의 인천도호부 부분
➋ 대정 2년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조선총독부 관보 1913년 12월 29일) 「도의 위치·관할 구역 변경 및 부·군의 명칭·위 치·관할 구역 변경에 관한 규정」
➌ 인천부읍지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청구기호 奎10713
➍ 인천광역시화도진도서관 『향토 개항 자료 도록』 2017.12

지난호보기이전글다음글
이전글 책 읽는 문화, 민들레 홀씨처럼 멀리 퍼져라!
다음글 부천, 문화로 피어나다
  • 정보제공부서 : 홍보담당관 미디어홍보팀
  • 전화번호 : 032-625-2147

홈페이지의 서비스 품질 향상을 위해 만족도 조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얼마나 만족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