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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군청의 세번째 이전과 답동 부천군청의 역사

부천군청의 세 번째 이전과 답동 부천군청의 역사


문학면 관교리 옛 인천도호부 관아에 최초의 부천군청이 세워진 뒤, 1921년 1월 부천군은 두 번째 청사를 인천부 내리 113번지로 이전했다. 이 청사는 옛 대한제국 시대 우체사 건물이었지만, 15개 면을 관할하는 광역 부천군의 청사를 감당하기에는 비좁은 규모였다. 그래서 1921년부터 1923년까지 3년간 군청사로 사용하다가 인천부 사정(寺町, 현재의 답동)에 있는 넓은 건물인 전 순천병원(順天病院) 건물을 매입 수리하여 이전하게 되었다는 기사가 확인된다.(1923년 4월 11일, 조선일보)

그렇다면 1923년 세 번째로 부천군 청사를 이전한 인천부 사정(寺町)의 전 순천병원은 어느 곳일까? 1930년 부천군에서 발행한 경기도 부천군 군세일반(郡勢一班)에서 군청 소재지는 인천부 사정 2번지(二番地)로 명시되어 있다.


답동 부천군청➊

한편, 이곳은 대한제국 때 법무대신과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등을 지낸 대표적 친일인사인 이하영(李夏榮)의 별장 터이기도 하다. 이는 1910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조사된 「경기도 인천부 부내면 사정의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에서 확인된다. 이하영 소유 대지에 언제 순천병원이 들어섰는지 알 수 없으나 1923년에 병원 건물이었던 곳을 매입, 수리하여 부천군 청사로 사용한 것이다.

부천군 청사의 세 번째 이전지인 사정 2번지(二番地)는 현재의 답동(沓洞)➌지역으로 천주교 인천교구 답동성당 인근이다. 1910년 당시 사정은 토지조사부와 지적원도에 의하면 64개 필지 중 이하영 소유 1개 필지와 답동성당 소유의 19개 필지를 제외하면 모두 일본인 소유였다. 특히, 일본인 단체인 인천거류민단(仁川居留民團) 소유의 토지가 대부분이고, 이곳을 ‘사정(寺町)’이라고 명명한 것도 1897년에 일본식 사찰인 동본원사(同本願寺)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후 부천군 청사는 1962년 8월 소사읍사무소 자리인 심곡리로 이전하기 전까지 답동에 계속 머물렀다.


당시의 행정구역과 부천군청 위치➋

한편, 『인천시사(仁川市史)』➍ 등에서 1940년 율목리(栗木里)로 군청사를 이전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당시 신문 기사, 관보, 조선총독부 기록물 등에서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없다. 다만 1923년 청사 이전 당시에도 부천군 청사는 매우 낡았기 때문에 1940년에 청사의 증·개축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크고 사정(寺町)은 율목리와 붙어 있어 율목리 부천군청으로 불렸을 가능성은 있다.

부천군 청사가 소사읍으로 이전한 1962년 8월 이후 이 건물은 중앙정보부 인천지부로 사용되다가 1973년 4월 말일성도 교회의 부지에 이어 현재는 천주교 인천교구(답동성당) 소유로 되어 있다.

※ 이곳에 실린 필자의 의견은 부천시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글. 부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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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 사진 출처 : 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인천시사 7권 제2장 사라진 근대건축』 1916.12. 207쪽
➋ 1930년 총독부 철도국에서 발행한 인천부 관내도(1/10,000)에 부천군청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부분 발췌)
➌ 답동이란 이름은 1977년 신포동에 편입되어 법정동으로만 존재하지만, 여전히 이곳을 답동이라 부르는 것은 답동성당 때문이다.
➍ 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인천시사 7권 제2장 사라진 근대건축』 1916.12.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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