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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가을, 역사 속을 걷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11-06
꿈기자는 지난 20일 경기도 오산시 양산동에 있는 독산성과 세마대지를 찾았다. 서문 주차장에 주차를 한 뒤 독산성에 오르기 위해 산길을 걸었다. 생각보다 산길은 험하거나 가파르지 않았고 간혹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돌계단과 흙길을 15분 정도 걷다 보니 독산성을 마주할 수 있었다.
서문 주차장 옆에는 독산성 서문으로 향하는 작은 산길이 열려있다.   ⓒ 우하랑 기자




15분 정도 돌계단과 흙길을 따라 걷다 보니 독산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우하랑 기자


1964년 8월 2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40호로 지정된 독산성은 ‘독성산성’이라고도 불린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쌓았던 성으로 통일신라와 고려, 임진왜란에 이르기까지 군사상 중요한 요충지로 이용되었다고 전해진다. 독산성은 평야 위에 우뚝 솟아있는 형태라 막힘이 없고, 주변을 살피기에 무척이나 용이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둘레가 무려 1,100m나 되는 퇴뫼식 산성이기에, 독산성 위에서는 오산과 수원, 화성까지도 한눈에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퇴뫼식 산성이란 띠를 두르듯 산 정상부를 빙 둘러 가며 쌓아 올린 산성을 뜻한다.)

독산성은 평야 위에 우뚝 솟아있는 형태라 막힘이 없고, 주변을 살피기에 무척이나 용이해 보였다.   ⓒ 우하랑 기자


이날은 무척이나 날씨가 좋았기 때문에 멀리까지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꿈기자는 그렇게 한참 동안 서서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산성을 따라 걷다 보니 땀이 나기도 했지만, 잠시 서서 쉬면 금세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서문에서 남문 방향의 풍경 모습이다. 높은 지대이기 때문에 추락 위험을 알리는 표지판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 우하랑 기자


산성을 주변을 돌다 보니 5개의 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독산성의 서문은 남문과 함께 주출입구 역할을 한다. 정조가 독산성에 행차한 적이 있는데 이때 서문을 통해 출입하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순조가 현륭원의 경관을 위해 서문을 폐쇄했는데 이를 1983년 복원하였다. 이때 서문을 폐쇄하는 대신 지은 성문이 바로 암문이다. 암문은 남문과 서문 사이에 있다. 서문과 함께 주출입구 역할을 하는 남문은 주로 말과 소가 다닐 수 있었다. 그에 비해 동문은 사람만 다니던 문으로 그 크기가 제일 작다. 나머지 북문은 사람만 다니던 작은 문이다.

수로 및 수구의 모습과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주춧돌도 볼 수 있다.   ⓒ 우하랑 기자


서문과 암문 사이에는 성안에 물을 빼고 생활 하수를 배출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수로 및 수구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산성 주변으로는 위험을 알리는 표지판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고지대이다 보니 추락 위험이 있기 때문에 옆 계단이나 길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주춧돌도 볼 수 있었다. 독산성에는 몇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얽혀있다. 첫 번째는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이 이끈 군대가 이곳에 장기간 포위당하여 위기에 처했는데 이때 왜군들은 벌거숭이산에 물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물을 뿌리며 조롱했다. 사실 이 성은 지리적으로는 훌륭했으나 물이 부족한 것이 큰 결점이었다. 하지만 권율 장군은 말을 끌어다 놓고 흰쌀을 끼얹어 말을 씻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이 모습을 본 왜군들은 성안에 물이 풍부하다고 생각하여 즉시 퇴각하였다고 한다. 왜군을 물리치고 전쟁의 승전과 관련하여 성안 꼭대기에 장대를 세웠는데 이것이‘말을 씻기다’라는 의미의 세마대(洗馬臺)이다. 세마대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파괴되었다가 1957년 8월 15일 다시 복원되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명장 권율 장군의 용기와 지기를 엿볼 수 있었고, 왠지 모를 통쾌함이 밀려왔다.

세마대(洗馬臺,洗馬坮)의 모습. 북쪽과 남쪽의 현판 모습이 조금 다르다.  ⓒ 우하랑 기자


두 번째는 지극한 효심을 가진 정조의 이야기이다. 독산성은 조선시대의 왕과 왕세자들이 한 번씩 들렀던 곳이기도 하다.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도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양온천에 행차하였다가 환궁하던 중 독산성에 하루를 지내기도 했다. 이때 이곳에서 활을 쏘기도 하고,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으며, 백성들을 위해 창고의 곡식을 풀어 내어주기도 하였다. 훗날 풍수지리의 문제로 산성을 없애야 한다는 말이 나왔지만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오히려 성을 튼튼하게 쌓도록 명하였다. 아버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정조의 마음이 애틋하게 느껴진다. 세 번째는 독산성 내 동문 쪽에 자리한`보적사`라는 작은 사찰이다. 이 절은 산성이 만들어질 때 지어진 것이라 추정된다. 옛날 가난한 노부부가 쌀이 한 되만 남게 되자 굶어 죽느니 부처님께 공양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그런데 절에 가서 쌀을 공양한 후 집으로 돌아오니 곳간에 쌀이 가득 차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부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 노부부는 열심히 공양하였다. 이후 열심히 공양하면 보화가 쌓이는 사찰이라 하여 보적사(寶積寺)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보적사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사찰로 대웅전 앞에는 석탑 하나가 우뚝 솟아있는 모습이었다. 석탑에는 크고 작은 크기의 부처가 가득 올려져 있는 모습이었다. 사찰 뒤쪽으로 가지런히 놓여있는 장독대의 모습에 눈길이 간다. 사찰 옆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독산성 내 동문 쪽에 자리한 작은 사찰 보적사의 모습이다.  ⓒ 우하랑 기자


꿈기자도 이곳에서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하고 다시 성 주변으로 걸음을 옮긴다. 북문 쪽으로는 성곽 발굴조사와 보수정비 공사로 인해 막아놓은 구간도 보였다.

남문에서 동문과 북문을 거쳐 서문 방향으로 가는 풍경 모습이다. 북문 쪽으로는 성곽 발굴조사와 보수정비 공사로 길을 막아둔 상태이다.   ⓒ 우하랑 기자


꿈기자는 서문에서 시작하여 암문, 남문, 동문을 지나 보적사, 세마대를 본 뒤 북문을 거쳐 서문으로 다시 나왔다.

깊어가는 가을 역사 속 여행을 마치고 되돌아가는 길(왼쪽)과 서문  ⓒ 우하랑 기자


탁 트여 있는 독산성에 오르니 답답한 마음도 개운해짐을 느낀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가을이 깊어짐을 느낀다. 아름다운 계절 가을에 이곳 독산성과 세마대지를 걸으며 그 옛날 역사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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