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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민기자단] 잊혀졌던 기억의 실마리를 찾아가다.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6-22
[경기도민기자단] 잊혀졌던 기억의 실마리를 찾아가다.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   ⓒ 경기도블로그


[박솔이 기자]저의 할아버지는 6·25전쟁 전시납북자입니다. 6·25전쟁 전시납북자는 전쟁 이전에 남한에 거주하던 국민이, 전쟁 중 본인의 의사에 상관없이 북한에 끌려가게 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북한은 전쟁중에 우리나라 각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사와 사회발전의 근간이 되는 청·장년을 계획적으로 납치했습니다. 북한 체제를 확립하는 데 필요한 인재를 확보하고, 전쟁에 필요한 인력을 보충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현재 6·25전쟁 납북 피해자는 대략 10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경기도민기자단] 잊혀졌던 기억의 실마리를 찾아가다.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   ⓒ 경기도블로그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이 생긴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가려고 마음먹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곳에 할아버지의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말이지요. 일주일 전 평화누리 공원에서 열리는 전시회가 있어 임진각을 갈 것이라고 아버지에게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늘 그렇듯 잔소리 하나를 보태셨습니다. “간 김에 6·25전쟁납북자기념관, 거기 한 번 다녀와 봐라.” 저는 시큰둥하게 ‘싫다’고 대답은 했지만, 말과는 달리 바로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에 방문해 할아버지 이름이 있다는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

[경기도민기자단] 잊혀졌던 기억의 실마리를 찾아가다.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   ⓒ 경기도블로그


할아버지의 이름은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 2층. 납북자 명단을 모신 곳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이름을 확인한 순간! 눈물이 났습니다. 할아버지의 기록이 있는 곳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 일주일 뒤 다시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을 찾았습니다. 기념관은 임진강역에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임진각 초입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념관 앞 전광판에는 ‘전시납북자 가족 여러분의 방문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여 방문하고 있는 납북자 가족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

[경기도민기자단] 잊혀졌던 기억의 실마리를 찾아가다.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   ⓒ 경기도블로그


방역수칙을 따른 후 천천히 입장합니다. 1층 안내데스크 옆에 안내 책자를 챙기시면 관람에 유용합니다.관람 홈페이지에서 방문을 위한 사전 예약도 가능합니다. 1층 특별전시실 <못 다한 시절-잊혀져간 삶의 기억> <미디어와 6·25-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시 진행 중 ​

[경기도민기자단] 잊혀졌던 기억의 실마리를 찾아가다.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   ⓒ 경기도블로그


가장 먼저 1층 안내데스크 오른쪽에 있는 특별전시실로 향합니다. 현재 <못 다한 시절-잊혀져간 삶의 기억>과 <미디어와 6·25-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두 개의 전시가 진행 중입니다. 먼저, <못 다한 시절 - 잊혀져간 삶의 기억>에 대한 전시부터 관람합니다. 납북자 가족들로부터 기증받은 소중한 유물들로 꾸린 전시관으로 납북자들의 삶을 조명합니다. 해당 전시는 2019년 11월 29일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

[경기도민기자단] 잊혀졌던 기억의 실마리를 찾아가다.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   ⓒ 경기도블로그


전시관에는 납북자의 유물과 함께 통계들도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부터 9월까지 발생한 납북 피해자는 전시 납북 피해자의 약 85%에 달합니다. 이렇게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납북이 대규모로 발생한 것은 북한이 계획적으로 사람들을 납치했다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당시 납북자의 96.7%는 남성이었습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적 특성상 핵심 인력의 성별이 남성이기도 했고 전쟁을 위해 남성을 필요로 했던 북한의 납북 목적을 보여줍니다. ​ 납북자의 80.2%는 자택 및 인근에서 납치되었습니다. 북한은 납북을 위해 개인별 인적사항을 사전에 파악하고, 은신처나 피신처까지 수색하는 치밀함을 보였습니다. 남겨진 가족들은 가족 구성원의 납치라는 정신적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생활고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아내는 생계를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자녀들은 어려운 가정형편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 1990년대까지 우리사회는 납북자 및 그 가족들의 아픔을 감싸주고 고통을 위로하기는 커녕 납북 피해자들에게 어로활동 제한, 해외출국 제한, 공공기관 취업제한, 군 생활 차별 등의 불이익을 주었습니다. 이곳에는 납북자들이 남기고 간 유품은 물론 납북자 가족들이 쓴 책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납북자와 납북자 가족들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공간에서 전쟁이 남긴 상처. 그리고 납북자 가족들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미디어와 6·25-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시실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아침 7시, 국방부는 라디오방송으로 북한의 남침 사실을 발표했지만 별다른 동요나 대대적인 피난 행렬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서울운동장에서는 야구경기가 진행됐습니다. ​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인사가 대전으로 피난을 떠났지만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녹음방송이 라디오로 퍼져 나오며 사람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그렇게 안심하고 있던 시민들 100만 여명은 6월 28일에 한강다리가 폭파되어 오도가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국내 신문사들은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신문 발행을 중단해야 했지만, 해외 각국 언론은 수백 명의 특파원을 보내 열띤 보도 경쟁에 돌입했습니다. ​ 6·25 전쟁 보도 사진과 기사들은 해외 주요 시사잡지에 게재됐습니다. 그 미디어들이 바로 이곳 전시실에 있습니다. 종군 기자나 포로를 비롯한 참전 군인들의 회고록도 있어 6·25전쟁에 대한 다각적 시선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 6·25전쟁은 체제 선전이 중요했던 국제전이었습니다. 미디어는 냉전의 무기로 체제 선전에 활용되었으며, 지금은 역사적 자료가 되어 당시 전쟁을 더 잘 살펴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하늘에서 살포되었던 다양한 삐라를 보는 것이 흥미로웠는데요. 내용이 참 다양하고 종류도 많았습니다. 전쟁의 아픔과 표적이 된 사람들, 2층 상설전시실 2층으로 가는 길, 조형물 ‘소용돌이 속으로’가 보입니다. 납북 이전의 납북자 가족의 사진으로 구성한 이 조형물은 뜻하지 않은 전쟁으로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간 납북자와 그 가족의 삶을 상징합니다. 계단을 오르며 저 또한 1950년의 소용돌이 속으로 향합니다.

[경기도민기자단] 잊혀졌던 기억의 실마리를 찾아가다.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   ⓒ 경기도블로그


2층에서는 가장 먼저 납북의 배경과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1층 특별전시실을 감상하여 상시전시실에서의 이해가 훨씬 쉽습니다. 전쟁 발발 직후 북한은 대대적으로 남한 주민을 연행하고 동원했습니다. 전시실의 각종 문서와 유물을 통해 납북 경로 및 과정을 살피다 보니 납북 현장의 자취를 따라가는 느낌입니다. 피해 가족들의 생활과 피해자들의 처참했던 상황을 재현한 공간이 있어 간접적으로나마 그들의 아픔이 전해졌습니다. 정부와 민간에서는 납북 문제를 해결하고 납북자 송환을 위한 노력을 해 왔지만, 북한은 현재까지 ‘납북자는 없다’고 주장하며 납북자들의 생사확인마저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제 할아버지의 이름의 있는 곳, ‘기억의 방’입니다. 시간 속에 사라져가는 납북자 문제를 잊지 않고자, 납북자 개개인의 이름을 하나하나 새겨 놓은 공간입니다. 할아버지 성함은 ‘박영우’입니다. 할아버지가 납북되던 당시 아버지의 나이는 2세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습니다. 당시 9세였던 아버지의 누나는 동생인 아버지와 함께 이곳에 왔던 날 저녁! 1950년 그날의 기억으로 가슴이 떨려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고모의 육성 증언을 녹음하여 간직하고 있습니다.

[경기도민기자단] 잊혀졌던 기억의 실마리를 찾아가다.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   ⓒ 경기도블로그


‘기억의 방’ 뒤편에는 납북자를 검색하고 북녘하늘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키오스크가 있습니다. 화면에는 제가 지난주에 훌쩍이며 할아버지에게 보낸 메시지가 그대로 있습니다. ​ 메시지가 담긴 영상을 찬찬히 보고 있으니 저처럼 진심을 담아 하늘로 보낸 메시지가 많았지만, 장난을 치거나 전쟁을 희롱하는 내용을 남기고 간 사람들도 있어 안타까웠습니다. ​ 이곳은 민족 분열의 아픔을 되새기는 곳이며, 납북자 가족에게는 유일하게 헤어진 가족을 그릴 수 있는 곳입니다.

[경기도민기자단] 잊혀졌던 기억의 실마리를 찾아가다.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   ⓒ 경기도블로그


북한의 침략에 국군이 점점 밀리고 있던 상황에서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상황은 반전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9월 23일 ,김일성은 후퇴명령을 하달했고 9월 28일에 국군은 서울을 수복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납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9월 20일경’은 북한군이 후퇴하는 와중에 사람들을 납치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무참히 사살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같이 붙잡혔다가 도망쳤던 동네 주민의 말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고문을 받았고 그 피가 담장 밖으로까지 튀었었다고 합니다.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은 납북 문제 해결을 위한 국가적 노력을 되새겨보고, 납북과 인권이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기념관 바깥으로 나와 임진각 방향으로 걷다 보면 ‘마중뜰’이 등장합니다. 이곳에 ‘귀환의 길’이라는 조형물이 있습니다. 납북의 길을 상징하는 미아리 고개를 모티프로, 미아리 고개를 넘어가는 납북자들의 방향은 정북을 향해있고, 미아리고개 아래 돌아오는 귀환자의 발길은 정남을 향해 있습니다. 오랜 그리움으로 다시 이곳에서 납북자들을 맞이하고자 하는 의지와 희망을 담았습니다. ​ <귀환의 길> 옆에도 납북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서도 할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이곳은 아버지에게 그리움의 공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얼굴도 모르는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궁금해하며 살았습니다.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이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희생되었던 할아버지와 그를 그리워하던 우리 아버지. 그리고 10만 명이나 되는 납북자와 납북자 가족들에게 이 공간이 위로와 위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동안 납북자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이 제게 ‘납북자의 가족’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줬습니다. 납북자 가족의 관점에서 보니 이곳은 납북자 가족에게는 마음껏 가족을 그리워 할 수 있는 고마운 공간이었습니다. 잃어버린 가족의 유품이 없어도 이곳에 새겨진 이름은 납북자 가족에게 크나큰 위로가 됩니다. 늦게라도 여기 이곳에서 아버지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경기도민기자단] 잊혀졌던 기억의 실마리를 찾아가다.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   ⓒ 경기도블로그


[출처:경기도블로그]
[작성자:2021 경기도민기자단 박솔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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