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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의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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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일한 박사 사진
  • 유일한(柳一韓)박사 (1895~1971)

    • 유일한 박사는 1895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으나, 1936년에 부천시 심곡본동 일대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근대적 제약공장을 세워 제약입국의 의지를 실천하였다. 해방 후에는 고려공과학원을 시작으로 배움의 터를 마련하고 유한중학교, 유한공업고등학교, 유한대학으로 점차 규모를 키워 인재를 기르는데 큰 노력을 하였다.
      돌아가신 다음에는 기업과 개인 재산 전부를 공익법인에 기증하는 청지기 정신을 몸소 실천한 나라사랑의 참 기업인이었다.
      우리 시에서는 이러한 유일한 박사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 중앙공원에 동상을 세워 많은 시민들이 그 뜻을 되새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 수주 변영로 시인 사진
  •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시인 (1898~1961)

    • 시인이며 영문학자인 변영로 선생은 1898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아호인 수주(樹州, 고려때 부천의 행정명칭)가 말해주 듯 고향은 부천이며(본적은 부천군 오정면 고강리) 그의 기념비와 묘소가 부천시 고강동에 있다.
      변영로 선생은 우리 민족의 정서 ‘한(恨)’과 나라사랑의 정신을 표현하는데 뛰어 났는데, 특히 대표시 ‘논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변영로 선생의 작품의 대부분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 민족의 해방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 뜨거운 민족혼이 잘 표현되어 있다.
      선생은 시와 수필, 영문학에도 뛰어났고 교육자, 언론인으로 이름났으며 무덤 앞에는 ‘생시에 못뵈올 님을’ 시비와 탄생 100주년 기념비가 서 있어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또, 중앙공원에는 1996년 ‘문학의 해’를 맞이하여 세운 수주 변영로 시비가 있다.
  • 몽당 한항길 선생 사진
  • 몽당(夢堂) 한항길(韓恒吉) 선생 (1897~1979)

    •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한항길 선생은 부천군 문학면 동천리(현 인천 동촌동)에서 태어났다.
      5살 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과 동몽선습, 유년필독, 소학 등을 서당에서 맹자 등 사서를 배웠다.
      선생은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구국운동에도 열심이었는데, 3.1독립운동에 참여해 서대문형무소에서 3여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소사공업기술학교를 세웠고 학교법인 한길학원과 부천대학을 세워 교육에도 힘썼으며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정신운동과 근검절약의 실천에 앞장섰다.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우리 시에서는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중앙공원에 동상을 세웠다.
  • 은성 목일신 선생 사진
  • 은성(隱星) 목일신(睦一信) 선생 (1913~1986)

    • 우리가 어린시절 불렀던 "자전거", "누가 누가 잠자나", "자장가" 등을 작곡한 은성 목일신은 우리 고장에서 26년간 살다가 타계하였습니다. 목일신은 1913년 1월 18일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3세가 되던 해에 동요의 고전이라 불리는 "자전거"를 짓고 동아일보에 동요 "산시내"를 발표한 이래 수많은 곡을 발표했습니다. 그 후 그는 교편을 잡았으며 인자한 선생님으로서 외유내강의 선비상을 보여주며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정년 퇴직하던 1982년에는 교육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가 인정되어 정부로부터 국민 표창을 수상하였습니다. 그의 작품은 우리 민족의 넋을 잠재워주고 흔들어 깨워주는 요람의 역할을 하였으며 어린이와 민중의 정서를 개척하기에 힘쓰는 등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평생 동요, 민요, 시, 수필 등 400여 편을 발표하였으며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 정지용 시인 사진
  • 정지용(鄭芝溶) 시인 (1902~?)

    • '향수'로 유명한 정지용은 현대시의 대부, 그리고 천재 시인 등으로 불리며 우리나라 현대시의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시인 정지용은 1902년 5월 15일 충북 옥천군 옥천읍에서 태어났습니다. 정지용은 1930년대 경향파시의 잡초 속에서 시어의 탁마와 참신한 감각시를 써서 후배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박두진 등 우리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인들을 대거 발굴하여 한국 문학을 풍요롭게 이끌었던 거대한 산이기도 합니다. 그가 우리 고장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차 대전 중 일제가 미국과의 전쟁을 앞두고 서울 사람들을 지방으로 소개령을 내릴 때 복사꽃 아름다운 우리 고장에 왔습니다. 정지용은 우리 고장에 내려와서, 우리말로 시를 짓는 일조차 죄가 되는 어두운 시대라 시를 사랑하는 마음은 가슴에 깊이 묻어둔 채 신앙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천주교도인 그는 이곳에 교당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인천교구를 찾아 다니며 물질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손수 벽돌을 쌓아 오늘의 소사성당을 있게 하였습니다.

최종수정일 : 202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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